17개 시도교육청이 공동으로 준비하는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학평)가 오는 24일 학생 등교 없이 학교에서 시험지를 배부받아 자택에서 치르는 방식으로 변경되자 학교 현장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교육부와 첫 학평 주관 교육청인 서울시교육청이 학생들이 등교할 시 세부 방역지침, 미응시 학생들에 대한 원격수업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20일 서울 양천구 한 고등학교 A(50대·남) 교무부장은 뉴시스와 통화에서 “채점을 하지 않는 모의고사를 볼 이유가 없다”며 “이런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A 부장은 “우리는 학생들이 평균 30~40분 거리에서 등교하는데, 오전 8~9시 사이에 600명이 몰려들게 되고 큰 학교는 1000명이 순식간에 몰려드는 것이다”며 “투표소에서도 버거웠는데 학교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학평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치르는 시험으로 수험가에서는 ‘교육청 모의고사’로 통한다. 일선 학교에서는 성적을 가지고 고등학교 3학년의 진학 자료로 활용한다.
통상 첫 학평은 고등학교 1~3학년이 모두 치르는데, 이번 학평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에 3월12일에서 4월2일, 16일, 24일로 세차례 미뤄지고 고1~2는 자율시행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이날 서울시교육청이 산하 고등학교에 내려보낸 ‘2020학년도 3월 학평 시행 방법 변경 안내’ 공문을 보면, 이번 학평은 고1~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학생들을 등교시켜 시험지를 받아가게 한 뒤 집에서 자율적으로 풀어보는 형태로 이뤄진다.
공문에 따르면 시험지는 오는 23일 오후 2시 이전에 전국 각 고등학교로 배송이 완료될 예정이다. 학교는 당일 오전에 문제지를 배부하되 ▲학생 방문시간 분산 ▲방문시 발열체크 방법 ▲드라이브스루, 워킹스루 등 대면 최소화 방법 등을 자체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시험지는 온라인으로도 공개된다. EBS 고3 전문 사이트인 EBSi와 각 시도교육청, 그리고 학교 홈페이지에 탑재할 수 있다. 단 1교시(국어영역)가 시작하는 오전 9시40분부터 각 교시가 시작하는 시간마다 순차적으로 올려야 한다.
시험을 응시하지 않겠다고 하는 학생이 나올 경우 원격수업 계획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고등학교 현장 교사들은 이런 조건을 지키면서 방역지침, 대비계획을 세우고 책임까지 학교가 다 지게 됐다고 토로한다. 고1~3학년 전 학년 학생들이 일시에 등교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게 돼 사회적 거리두기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성북구 한 고등학교 고3 담임인 B(50대·여) 교사는 “이렇게 목숨 걸어서 풀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연습을 해야 한다면 충분히 등교한 이후에 자율적으로 연습할 시간을 부여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B 교사는 “시험지 탑재 시간을 기준시간보다 앞당겨 하지 마라는 것도 황당하다”며 “예를 들어 1반은 8시반, 2반은 10분 뒤 이렇게 계획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학생들이 (시험지를) 촬영해서 먼저 올리기라도 하면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A 부장도 “방역 때문에 안 보기로 한 모의고사를 이번에는 1, 2학년까지 끌어들여서 30분 사이에 시험지를 받아가라는 게 아닌가”라며 “시험을 재차 연기하는 방법도 있는데 인쇄해 놓은 시험지를 소모하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를만큼 화급한 일인가”라고 교육당국을 강하게 비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수험생들을 위해 학교에 와서 시험지를 받아가도록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시험을 또 다시 연기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학사일정 부담을 이유로 들었다.
서울시교육청 해당 실무 관계자는 “다른 시도교육청들은 한 번 더 미루면 다른 학평과 6월 모의평가 때문에 어렵다는 입장”이라며 “학교도 5월 등교수업이 개시되면 그 때 중간고사를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 시험지를 갖고 원래 수능의 형태와 가까운 방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싶어하는 학생이 있다”며 “고3 학생들 중에서 수능을 준비하려는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 와서 시험지를 가져가라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원단체들도 교육당국이 행정적 부담을 학교, 학생, 학부모에게 떠넘겼다고 지적한다. 교육당국은 등교 여부나 실시 방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라는 입장이지만, 이번 결정이 사실상 등교를 강제했다는 분석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신현욱 정책본부장은 “시험지가 나온 상태니 그것을 갖고 출결을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며 “다른 방향으로 고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적 부담을 학부모, 학생, 학교에 떠넘기는 굉장히 부적절한 행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김홍태 서울지부 정책실장은 “학평 무산에 대한 뚜렷한 지침이 나가지 않으니 학교 현장은 중구난방이 되고 방역은 학교의 책임으로 넘어가는 것이다”며 “어떤 학교는 등교해서 가져가라 한다면 다른 학교에서는 왜 우리는 안 그러느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어린이날인 5월5일까지 연장하면서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은 만큼 이번 기회에 수능을 중심으로 학교 현장이 움직이는 이른바 ‘수능공화국’ 체계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정책실장은 “수능을 대비해서 학교에 나와서 학평을 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던 것으로 안다”며 “이 비상시국에도 수능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던 수능공화국을 학평 취소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